LG전자는 2010년 8월, 디자인 경영의 전진기지인 디자인경영센터의 수장으로 당시 KAIST 산업디자인학과장이었던 이건표 교수를 전격 기용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건표 부사장은 한국에 사용자 중심 디자인 방법론과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정립시킨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석학으로, KAIST가 세계 30대 디자인 학교로 선정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학자에서 경영인으로 변신한 그를 디자인맵에서 만나보았다.
물리적, 시간적으로 일단 스케일이 다른 것 같습니다. 물리적으로 KAIST에서 산업디자인 전공 학생 120여 명을 지도했다면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에서는 600여 명 이상의 인력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시간적으로도 학계에서는 교수로서 연구 성과를 내고 평가를 받는 데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고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또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사회에 나가서 결실을 맺는 것을 지켜볼 때까지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요. 하지만 기업에서는 제품을 출시하고 2,3개월 안에 그 제품의 성패가 판가름 납니다. 또 학교에서는 자율적으로 연구 주제를 잡고 시간을 들여 심화시키는 반면 기업에서는 단기적인 목표와 데드라인이 있으니까, 치열함의 강도가 다르다고 할까요? 세계적으로 IT, 전자 산업계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학계에서 보낸 25년을 뒤로 하고 이곳으로 온 지 1년 2개월 정도 지났는데, 아직도 적응하는 중이고 중책을 맡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요즘의 제 생활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익사이팅(exciting)’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숨가쁘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 노력 중입니다.
LG전자, 옵티머스 LTE(좌), 스탠드 김지냉장고 쿼드 매직블랙(우)
제가 1981년에 대학을 졸업할 때, 디자인 분야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외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순수 예술적인 것을 지향하는 학교와 디자인 과학 쪽에 특화된 일리노이 공대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는데 저는 일리노이 공대를 택했죠. 그리고 디자인 과학적 접근 방식에 심취해서 귀국한 다음에는 KAIST에 몸담게 되었습니다. 당시 KAIST는 비전문가를 전문가로 육성한다는 취지를 내세웠고 저의 연구 방향과도 잘 맞아떨어졌죠. 당시 한국에 UI 전문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과분하게도 ‘UI라는 개념을 한국에서 최초로 정립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 같습니다.
LG전자로 온 이후에는 구체적인 제품 디자인 하나하나를 디자이너들에게 지시하기 보다는 UX 방법론, 프로세스 방법론 등을 정립하고 조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UX혁신디자인연구소’라는 조직도 신설해서 콘셉츄얼한 제품들을 만들고 있고요. 전사 차원에서 공유할 수 있는 UI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가이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반영된 제품은 내년에 더 많이 출시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이 사용자 경험 디자인을 중시하면 직원들이 UX 연구 개발에 더욱 매진하는 풍토가 형성되기 때문에 앞으로 LG전자의 디자인이 더 좋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1959년 한국최초의 라디오
LG전자는 특허 관련 전문 조직을 두고 전사적으로 특허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디자이너들에게 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디자이너들이 뭔가를 개발하면 아무리 작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특허로 등록해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는 경쟁 기업들이 소송을 걸어올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특허 등록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요즘 이슈가 되는 글로벌 기업 간의 소송은 특허 보호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구체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LG전자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다른 나라의 기업이 판을 이끌어 가고 한국 기업이 이를 따라잡기 위해 애쓰는 구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LG전자가 새로운 게임의 판을 만드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봅니다.
LG는 사실상 한국 가전 디자인을 이끌어 온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어요. 1950년대에 한국 최초로 기업 내 디자인 팀을 만든 게 LG였습니다. 그리고 국내 최초로 라디오, TV 등 가전 제품들을 만든 것도 바로 LG였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이곳에 와서 직접 겪어 보니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인재들의 역량과 의지도 충분하다고 확신합니다.
2011년 LG 스마트TV, LW9800
사실 이번에 인터뷰 요청을 받고 처음 들어가 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굉장히 풍부한 전문 자료들이 모여 있어서 놀랐고 사이트나 웹진도 아주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데이터, 정보, 지식은 질이 다릅니다.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것을 추출하면 정보가 되고 이것을 잘 분석하면 지식이 되겠죠. 그래서 디자인맵 사이트에 축적된 많은 데이터와 정보를 기반으로 미래 트렌드를 예측한다든지 하는 심층적인 분석이 더 많아진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디자인 유관 기관이나 행정 기관들이 중복해서 데이터 뱅크를 만드는 것보다는 한국 디자인을 포괄하는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된다면 더욱 효율적일 듯 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어떤 디자이너가 자기 것과 유사한 디자인이 이미 특허로 등록되어 있나 검색해 보고 싶을 때 간단히 디자인을 넣으면 인공지능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도 있게 하는 거죠. 얼굴 인식을 해서 닮은 꼴 인물을 찾아주는 앱처럼, 요즘 그래픽 이미지 유사성을 계산해 주는 알고리즘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용하고 연구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한국 학생들이 유독 대학을 속성 학원 다니듯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학벌이나 나이를 따지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원인이겠지만, 학생들이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빨리 뭘 이루어야 한다는 심적 압박이나 불안감이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스펙’을 갖추는 데 주력하는 것이겠죠. 반면 외국의 학생들은 학교에 좀 더 장기간 적을 두고, 학교를 사회에 나가기 전 면역 주사를 맞는 과정으로 여깁니다.
저는 그래서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모든 것을 완성하려는 강박을 버리고 어떤 토대나 그릇을 만드는데 집중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실패하거나 우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것저것 관심 가는 대로 해보는 게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도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T자형 인재’라고 하죠? 넓게 파 보아야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업에서도 직원들을 뽑을 때 다양한 면을 보려고 합니다. 참고로 현재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도 직원들의 10% 이상이 디자인 비전공자입니다.
LG전자의 디자인 경영을 이끄는 책임자로서 사명감을 느낀다는 이건표 부사장. 그의 목표처럼 LG전자가 세계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지켜보자.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위해 시간을 내 준 이건표 디자인경영센터장께 감사 드린다.
이미지출처 : (주)LG전자 제공
글/ 디자인맵 편집부